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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특집]일본학도병을 구해준 항일유가족과 그 뒤이야기

2017-08-15 길림신문 朝闻今日

나의 할아버지는 극히 평범한 농민이였고 155센치메터의 왜소한 체구였지만 나에게는 항상 거룩한 형상으로 남아있다. 

그것은 아버지가 전선에서 희생된 후 어려서부터 내가 할아버지의 슬하에서 자란 리유도 있지만 또 한 일본학도병과 맺어진 감동적인 생사인연이 나를 깊이 감복시킨 원인도 있다. 

나의 할아버지 방창도는 1892년 조선 함경북도 부령군 삼하면 노은동의 한 가난한 농민의 가정에서 태여났다. 항상 가난에 쪼들렸지만 증조부는 그래도 할아버지를 서당에 보내 글을 읽게 하였다. 

할아버지가 생전에 남긴 유일한 사진(앞줄 오른쪽 두번째 사람)

1908년 “만주(주: 당시 위만주국이 위치한 중국 동북지역을 가리킴)에 가면 잘살 수 있다”는 말을 듣고 할아버지는 16살 어린 나이에 두만강을 건너 연변에 왔다. 할아버지는 연변에서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며 품팔이를 하다가 연길시 소영촌에 정착하게 되였다.

1915년 7살 년하인 정명순과 결혼한 후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선후로 자식 14명이나 낳았지만 11명이 이러저러한 질병으로 목숨을 잃는 아픔을 겪었다. 심지어 시집 갈 나이가 다 된 두 딸이 전염병으로 한날 한시에 목숨을 잃어 할아버지 내외는 너무도 기가 막혀 눈물도 말라버리고 하늘이 다 무너져내리는 것만 같았다고 한다. 자식들이 하나 둘 병에 걸려 쓰러져 들려나가도 돈이 없어 치료를 못하는 형편이니 할아버지의 심정인들 오죽했으랴. 

그 후 할아버지는 의학을 배워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려는 생각으로 한의학 서적들을 보기 시작하였는데 병을 보면서 몇년이 지난 후 용하다고 소문이 났다. 할아버지는 가난한 사람들의 병을 봐줄 때는 일전 한푼 받지 않아 돈이 없어 병원에 못 가는 농민들이 자주 찾는 토배기 한의로 린근에 소문이 났다.

1945년 8월 15일에 일제가 투항하자 연변의 여러 민족 인민들은 해방의 새삶을 맞이하게 되였다. 집안의 장자인 나의 아버지 방주환은 30살의 중년이였지만 고향을 보위하겠다는 굳은 신념으로 부모처자와 리별하고 단호히 동북민주련군에 가입하였다. 

1946년 내가 둘째아들로 태여났을 때에는 아버지께서 이미 참군한 뒤라 나는 아버지의 얼굴도 보지 못하였다. 그 해 사평보위전(4~5월) 이후 아버지의 소식이 뚝 끊기였다. 집에서는 매일 긴장과 불안 속에서 아버지의 소식을 기다렸지만 년말이 되도록 소식이 없었다.

어릴 적 기억 속의 모습을 찾을 수 없는 소영촌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없자 할아버지는 불길한 예감을 지울 수 없어 끝내 아버지의 생사를 확인하려고 부대를 찾아 길을 떠났다.

그 때가 1946년 추운 겨울이였다. 사평으로 갔으나 동북민주련군이 이미 북으로 철거한 뒤였다. 할아버지는 장춘을 지나 목단강까지 가면서 전선에서 희생된 전사들을 묻었다는 곳은 다 돌아다니면서 아버지를 찾았다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생사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아버지는 국민당군과의 전투에서 복부에 중상을 입고 림시구급소에서 구급을 받다가 희생되였다. 당시 함께 치료받던 모 부대 퇀장이 1951년 연길륙군병원 즉 현재의 223병원에서 할아버지한테 그 소식을 전해주고 증명자료를 작성한 후 연길시정부와 교섭하여 1953년에 렬사증을 보충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할아버지는 목단강 시교의 한 공동묘지의 수많은 비석들 사이를 오가며 아버지의 이름을 찾다가 찾으려던 아들은 못 찾고 병에 걸려 무덤 사이에 웅크리고 있는 나어린 일본병사를 발견하게 되였다.

아들을 찾지 못해 속이 재가 된 할아버지는 이렇게 일본 학도병과 인연을 맺게 되였다.

일제 강점시기 일본군이 저지른 만행을 생각하면 못본 체 그냥 지나쳐버릴 수도 있을 할아버지였다. 더우기 30년대 항일유격대원으로 활동하던 두 사촌동생이 의란대토벌 때 일본군에 무참히 학살된 것을 생각하면 치가 떨렸을 것이다. 그러나 사경에서 허덕이는 어린 학도병의 얼굴을 보는 순간 할아버지는 이 소년도 일본군국주의자들에 의해 전쟁터에 끌려왔고 한번도 전투에 참가하지 못했는데 무슨 죄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그저 지나칠 수가 없었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할아버지는 일본 학도병을 보면서 그를 기다릴 부모들을 생각하였다. 일본침략군은 조선을 병탄하고 중국을 침략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귀중한 목숨을 앗아갔지만 나어린 소년인 저런 자식을 사지로 떠나보낸 부모의 심정이야 오죽하랴! 할아버지는 그를 등에 업고 목단강역을 향해 씨엉씨엉 걸었다.

그 일본 소년병의 이름은 나까다 게이오(中田庆雄)였다. 1945년 초봄 14살 밖에 안된 나까다 게이오는 일본군국주의자들이 중국 동북3성에 대한 침략을 강화하려고 조직한 ‘청소년개척의용군’에 뽑혀 흑룡강성 모 훈련영에 오게 되였다. 몇달 후 쏘련홍군이 동북으로 진격하자 그 훈련영은 해산되였고 나까다는 포로수용소에 갇혔다가 하루라도 빨리 일본으로 돌아가려는 생각으로 수용소에서 탈출하였는데 굶주림과 추위에 허덕이다가 무서운 독감에 걸려 이렇게 사경에 이르게 되였던 것이다.

소영촌에 업고 온 나까다를 보고 할머니와 삼촌들이 놀랐다. 나의 아버지를 찾으러 갔던 할아버지가 생면부지의 ‘일본놈’을 업어왔으니 말이다. 그래도 할아버지는 인명이 천명이라면서 따스한 구들목에 나까다를 눕히고 미음을 떠먹이면서 매일같이 침구와 약물로 정성스레 치료하였다. 인사불성이던 나까다는 차츰차츰 정신을 찾았고 기력도 하루가 다르게 나아지면서 어떻게 되여 중국에 왔고 목단강 북산의 공동묘지에서 까무라쳤는지를 자초지종 이야기할 수 있게 되였다.

고향을 찾은 구술자 방형섭(왼쪽)과 소꿉친구 김칠덕

우리 집에서 치료받던 나까다가 차츰 거동할 수 있게 되자 할아버지는 식구가 많은 우리 집 환경이 환자치료에 영향이 있다면서 앞집에 살고 있는 조씨(한족)네 집으로 옮겨가 계속 치료를 받게 하였다.

마음씨 착하고 부지런한 나까다는 신체가 회복된 후 할아버지의 은혜에 보답한다면서 우리 집과 조씨네 집에서 1년간 농사일을 도와주었다. 그러다가 연길시화학공장에서 로동자 모집에 합격되여 로동자로 되였다. 일본에서 중학교까지 다닌 나까다는 중국 사회주의건설에 참가하여 열심히 일하였고 얼마 후 능력이 인정되여 길림시화학공장으로 전근되였다. 총명하고 부지런한 그는 여러번이나 로력모범, 선진생산자로 당선되였고 직장 부주임까지 하게 되였다.

일본인이였지만 사회주의건설에 공헌이 큰 나까다는 1953년 공장의 추천으로 중국인민대학에 입학하여 한어와 경제학을 공부하게 되였으며 거기에서도 품행과 학업이 모두 우수하여 ‘일등모범생’으로 평의받았고 3년 후에는 역시 추천으로 상해 복단대학에 입학하여 한어를 전공하였다. 나까다가 길림으로 떠나간 후부터 할아버지와 우리는 그의 소식을 알 수 없었고 나까다 역시 한번도 편지나 전보를 보내온 적이 없었다. 후에 알게 되였지만 복단대학을 졸업한 1958년에 그는 고향을 떠난 지 13년 만에 일본으로 돌아갔다.

귀국한 후 나까다는 자기의 모든 힘과 정열을 중일 경제협력과 중일 우호관계를 추진하는 사업에 바쳤다. 그가 리사장직을 맡고 있었던 일본국제무역추진협회는 일본 국내의 7대 일중친선단체중의 하나이다.

나까다는 선후로 382차나 중국을 방문하였으며 생전에 주은래, 등소평, 강택민, 주용기, 호금도 등 당과 국가 지도자들의 친절한 접견을 여러차례 받았다. 나까다가 중일 우호협력 관계를 추진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기에 2003년 1월 20일, 중일우호협회 회장 송건은 중국정부를 대표하여 나까다에게 ‘중일친선사절(中日友好使者)’칭호를 수여하였고 2006년 국가상무부에서는 나까다에게 ‘백기휘황 걸출기여상(百届辉煌 杰出贡献奖)’을 수여하였다.

나까다 게이오(2005년)

나까다는 항상 사업에 분망히 보냈으나 자기의 두번째 고향인 소영촌을 잊지 않았다. 1998년 나까다는 ‘두만강지역국제협력개발포럼’에 참석하려고 훈춘으로 가던 길에 차머리를 돌려 생명의 은인인 할아버지를 만나보려고 소영촌을 찾았다. 그러나 그 때는 할아버지께서 세상을 뜬 지 이미 30년이 지난 후였다.

나까다선생은 더없이 서운해하면서 할아버지에게 드리려던 선물을 삼촌한테 맡기고 아쉬운 마음을 금치 못한 채 발걸음을 돌렸다. 삼촌도 그 후에 사망하다 보니 그 때 무엇을 선물받았는지는 모르지만 귀중한 물건이였을 것이다. 

당시 그의 신분은 일본국제무역추진협회 리사장외에도 중국의 북경, 상해, 길림성 등 20여개 성, 시와 연변조선족자치주의 경제고문이였다. 마침 길림성대외무역국에 근무하던 조씨네 큰아들이 길림성을 방문한 나까다선생을 알아보았고 그의 주선으로 연변행이 이루어진 것이다. 

2002년 6월, 나까다선생은 나의 삼촌에게 편지를 보내와 56년 전의 일을 다음과 같이 회억하였다. 

“생활이 극도로 어려웠고 그 어떤 의료조건도 없어 고통에 시달릴 때 자애로운 방로인의 침구 치료를 받아 독감에서 완쾌되였던 광경을 회억하면 만감이 교차됨을 어찌할 수 없습니다. 나는 그 때 15살 밖에 되지 않았는데 소영촌에서 엄동설한을 지냈고 당신의 부모와 함께 일하면서 농사일을 배웠고 인간의 도리를 배웠습니다. 그 후 연길 하남에 있는 화학공장으로 가서 새 중국의 공업 건설에 참가하였습니다. 그 때로부터 지금까지 반세기가 넘는 55년간 나는 줄곧 일본과 중국간의 경제기술우호협력사업에 종사하여왔습니다. 나의 몸에는 방로인의 우애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방로인 일가와 조씨 일가의 은혜는 평생을 두고 잊을 수 없습니다. 이 역시 나의 일생을 일중우호협력사업에 바치는 중요한 힘의 원천입니다.”


2009년 5월, 나까다선생은 병환에서 78세의 고령으로 중경직할시를 방문하였는데 이것이 그의 마지막 중국방문이였다. 귀국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병원에 입원하여 수술치료를 받았으나 효험을 보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나까다선생은 참말로 중일 우호사업을 위해 필생의 몸과 마음을 다 바친 분이였다.

나까다의 편지에서 읽을 수 있듯이 한 조선족 항일유가족이 구해준 일본 학도병이 성장하여 중일 우호관계와 경제협력을 위해 일생의 정력을 다 바칠 수 있은 데는 고상한 인도주의 정신으로 사경에 처한 소년 나까다를 자기 자식처럼 살뜰히 보살피고 치료해준 할아버지의 공로도 얼마만큼은 있을 것이다.


중국 언론의 취재를 받고 있는 나까다 게이오(2006년)

나다까선생이 세상을 뜬 지도 벌써 8년이 지나갔고 나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도 이미 50년이란 시간이 흘러갔다. 그리고 일본군국주의가 패망한 지도 72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다.

할아버지는 생전에 나에게 실제행동으로 사람이 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일본 소년을 구해준 일이다. 나까다선생은 할아버지를 “인간의 도리를 배워준 분” 이라고 했다. 바다같이 넓은 흉금과 따뜻한 인간애, 남들에게 베푸는 것을 락으로 삼고 크고 작은 일에서 언제나 남부터 생각하는 할아버지의 고귀한 품성은 내 인생에서 본보기였다. 내가 선후로 연길시공상관리국당위 기률검사위원회 서기, 연길시개체사영기업련합회당위 서기 등 직무를 력임(현재 정년퇴직)하면서 나라와 인민의 공복으로 열심히 살아온 데는 할아버지의 인생가르침이 아주 훌륭한 교과서가 되였다. 

방형섭 구술/ 박승헌 김태국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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