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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상기8] 대지진 현장에서 느껴본 일본인

길림신문 朝闻今日 2020-09-09


2011년 3월 11일 금요일, 기억 속에서 도무지 지울 수 없는 날이다.


그날 나는 지인들과 함께 레스토랑에서 조금 늦어진 점심식사를 하고 있었다. 주위는 식사하는 손님들과 커피타임중의 손님들로 법석하였다.


오후 2시 40분 쯤 (후에 14시 46분으로 밝혀 졌음)되였을 때, 레스토랑 건물이 상하로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평소보다 조금 강한 흔들림이였다. “또 지진이네~” 우리는 항상 그러하듯이 지나가는 지진인 줄로 알고 식사를 계속했다.


사실 일본에 오래 살다 보면 자연적으로 지진에 적응하게 된다. 일본에 온 초기에 밤중에 잠간 흔들린 지진에 놀라서 아들애를 껴안고 밖으로 피난을 했었다. 그런데 나처럼 뛰쳐 나온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이상한 감이 들었고 아무 일도 없듯이 잠 자는 남편 때문에 화난 적도 있었다. 그 후 점차 작은 흔들림에 적응이 되고 그 흔들림의 강도와 시간으로 대체적으로 진도(震度)를 추측할 수 있게 되였으며 지진대책으로 지어진 일본주택이 비교적 안전한 것임을 깨닫게 되였다.


2011년 3월 11일 지진 직후의 이와테현 미야코시(자료사진)


그런데 그날은 아니였다. 지진 발생지와 멀리 떨어져 있는 동경에서도 심하게 흔들림을 감촉했다. 상하로 크게 흔들린 3,4초 후 본지진으로 심하게 좌우로 흔들기 시작했다. 7층인 레스토랑은 30년전의 건물이여서 흔들림이 례사롭지 않았다. 천천히 그리고 강한 흔들림을 느꼈다. 각종 전자시스템이 ‘삐ㅡ삐ㅡ'경종을 울리기 시작했고 주방의 용구들이 무너지는 소리가 무섭게 요란스러웠다. 더구나 눈 앞에서 흔들리는 건물이 공포 그 자체였다. 일본내의 근대적 관측 사상 최대 규모의 지진이였다니 나도 주위의 모든 사람들도 실성할 정도로 혼란상태에 빠졌다.


나는 평소에 익히고 있었던 지진발생시의 상식대로 인차 테블 밑에 들어갔다. ‘오늘 이렇게 죽는구나’ 거의 절망에 빠졌던 나는 같은 테블의 지인들 모습이 눈 앞에 없음을 그제야 확인하였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테블 밑에서 나왔다.


“아…” 와중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지인들을 비롯한 이들이 로인들을 테블 밑에 피난시키고 있었다. 울고 있는 아이들을 달래면서 테블 밑에서 끌어안고 있았다. 물론 이들은 전혀 모르는 사이들이였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웨치는듯 하는 그들의 목소리가 무서운 공간에 큰 위안을 주었다.


그때의 그 창피함을 나는 잊을 수 없다. 때늦게 나도 인차 그들 속에 끼여 주저앉은 로인을 부축하여 비교적 안전한 곳으로 피난을 시켰다. 그리고 2분간, 두시간으로 느껴지는 그 공포 속의 2분간 그분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영원히 지울 수 없는, 그리고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는 그 2분간의 대 난리 속에서 나는 백년에 한번이라는 대진재의 무서움과 함께 일본인들의 몸에 배인 ‘배려심’을 똑똑히 보았다.


지진이 멎은 후 7층으로부터 내려오는 과정은 또한 나를 머리 숙이게 하는 순간들이였다.


레스토랑안에 있었던 사람들중에는 로인도, 몸이 불편한 사람도 있었지만 건강한 사람이 대부분이였다. 언제 다시 여진이 닥쳐들지 모르는 무시무시한 시각이였는데 로인과 몸이 불편한 분들을 부축이며 뒤에서 천천히 내려오는 모든 사람들이 내 눈에는 영웅처럼 보였다.


결국 달려 내려오면 10분도 안 걸릴 계단을 우리는 그렇게 20여분을 내려왔다.


후에 그런 피난방법을 두고 여론이 많았지만 ‘우리가 달려서 내려가고 나면 남은 이들의 마음은 얼마나 조급할가…’ 라는 그들의 마음을 두고 동감을 표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였다.


약한 자에 대한 배려, 어린이와 로인에 대한 배려가 일본인들에게 있어서 습관과도 같은 ‘당연함’ 에 해당 되는 일일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제일 먼저 우리가 배워야 되는 미덕이라는 생각이 든다.



일본 지진에서 맺어진 고마운 인연


2011년 3월 11일 오후에 발생한 일본 동북지방의 태평양 해역 지진은 그 후에 일어난 쓰나미, 그리고 빈번한 여진과 더불어 사람들의 생활을 구축해왔던 기반시설에 큰 타격을 주었다.


우선 교통기관이 중단되였고 일부 지방의 통신이 차단되였으며 정전으로 모든 시설이 혼란상태에 빠졌다. 오후에 발생된 지진이라 수도권내에서만도 515만명에 달하는 귀택 곤난자(帰宅困難者)가 생겼다.


나도 그들 중의 한사람이였다. 시부야(渋谷)역의 전차가 움직이지 않고 뻐스도 제한된 상황에서 택시를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기다리는 사람이 몇백명 정도였고 가끔씩 밖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 택시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무작정 기다려야만 하는 눈앞의 현실에 아예 걸어가려고 작정하는 사람들까지 보였다. 그리고 자전거를 사러 나서는 사람들도 있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 날 저녁 택시를 잡지 못하고 10여시간 내처 걸어서 귀가한 사람들이 수두룩했고 자전거가 죄다 팔리는 품귀현상이 일어났으며 아예 집에 돌아가지 못한 인수가 외출자의 28%였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누구도 체험해보지 못한 일이 발생했는데 랭정하고 차분한 일본인들은 조용하게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지진 때문에 널려있는 슈퍼의 상품들을 나름대로 정리해주었다는 손님들이며 물류가 끊긴 상황에서 누구의 지시도 없었지만 한사람이 하나만 사는 걸로 뒤사람을 배려했다는 시민들이며 택시를 기다리는 몇시간 동안 아무 혼란도 없이 서로 고무하면서 차례를 기다렸다는 등등…


일본 대지진 당시 불편한 교통상황에서도 질서정연한 일본인들(자료사진)


그 날 세시간 남짓이 택시를 기다리다 보니 밤이 깊어왔다. 누군가 어깨를 두드리는 것 같아서 뒤돌아보았더니 회사원인 듯한 분이 빵을 건네주었다. 빵 하나를 세등분 나누어 나, 그리고 자기, 뒤에 줄 선 분한테 나누어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 한쪼각의 빵 덕분에 그 날 저녁을 무사히 버텼는지도 모른다.


근 네시간을 기다려서야 같은 방향으로 가는 네 사람이 택시에 앉았다. 타기는 했지만 걷는 것보다 약간 빠른 정도의 속도로 택시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로는 차로 꽉 막혔고 자전거를 타는 사람과 걷는 사람들로 붐비였다. “앞이 안 보인다”는 말 그대로였다.


새벽녘이 되여서야 우리 네 사람이 협의해서 정한 지점에 택시가 도착하였다. 료금은 평소의 3배 이상으로 올라갔지만 그런 것에 신경쓸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네 사람중 한 사람이 소지한 돈이 모자라다고 했다. 갑자기 생긴 일이라 그럴 법도 했다.


“한두푼도 아닌데, 전혀 모르는 사이이고…”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중의 한 사람이 선뜻 만엔을 선대하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자기의 계좌를 알려주면서 갚을 수 있을 때 갚으라고 했다. 그리고 나서 자기 갈길을 갔다. 너무 멋있는 뒤모습이였다.



평소에는 차겁다 할 정도로 느껴지는 일본인들, 항상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남의 프라이버시에 발을 들여놓지 않는 일본인들을 많이 보아왔다. 하지만 “3.11 대지진”을 겪으면서 따뜻한 마음을 지닌 그들을 보았고 고요함 속에 들어있는 알맹이 같은 정을 느끼게 되였다.


지진으로부터 3년 쯤 지난후 “고마운 인연”이라는 제목으로 쓴 수필을 신문에서 보았다. 택시에서 돈을 꾼 사실을 깜빡 잊고 있다가 두달 후에야 돈을 되돌려주게 되였고 그 후부터 해마다 한번씩 같이 온천려행을 다니는 “3.11친구”로 되였다는 마음마저 따뜻해지는 내용이였다. 혹시 그 날 그 두 사람의 이야기는 아닐가? 아니, 어디에서나 있었을 수많은 사연중의 하나일 것이다.


6년 반이란 세월이 흘렀다. 필경 내가 만났던 그 두 사람도 아름다운 인연으로 고마움을 이어가고 있을 것이다.


길림신문 일본특파원 리홍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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