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강일 추리소설] 도시는 알고 있다(9)
우리 문단 신선한 활력소! 추리소설 작가 허강일!
극작가, 시인, 기자로서의 허강일이 펼쳐보이는 숨막히는 드라마!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한치 앞도 내다 볼수 없는 운명의 대결! 지금 펼쳐집니다.
화목련재
허강일 장편추리소설
도시는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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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성실업의 진성 리사장과 주회장의 마누라 강미나가 강뚝 양꼬치집에서 만난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만 해도 강호는 놀라지 않았다. 재벌과 재벌 마누라의 만남에 크게 의미를 부여하기는 싫었던 것이다.
그러나 진성과 미나가 힐튼호텔에서 날을 샜다는 소식을 들은 후 강호는 충격을 받았다.
강표에게서 건설은행 안과장과 주회장의 마누라 미나가 오래전부터 불륜관계라고 들었을 때만 해도 강호는 젊은 녀자의 욕구불만에서 오는 생리현상으로 묵과했다. 그러나 주회장의 미망인 미나와 진성실업의 진성 리사장이 술을 같이 마시고 잠자리까지 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 충격을 받았다. 신분이 높은 두 사람이 만난 당일에 관계를 가졌다는 것은 본래부터 일반 관계가 아님을 말해준다.
“오랜만에 만난 관계 같았다고 하였습니다.”
강표가 전화로 알려줬다.
“무슨 근거로?”
강호는 폭발적인 소식을 접하고도 차분함을 잃지 않았다.
“그날 써빙했던 복무원이 말하는 데 따르면 주회장 사모님은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울먹였다고 합니다.”
“그래?”
“네. 진성이란 분도 눈물을 흘리더라고 합니다. 당시 이른 오전이라 손님이 없었기에 기억이 생생하다고 합니다.”
강표는 오래된 첩보군답게 상세히 회보하였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강호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진성과 미나는 혹시 련인관계? 강호는 여러가지 추측을 날려보았다. 가령 련인관계라고 할 때, 주회장의 죽음을 타살이라고 가정하고 보면 혐의범이 또 하나 늘어난다. 진성 리사장도 주회장을 죽인 혐의범에 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나와 불륜관계를 맺었던 건설은행 안과장도 진성 리사장의 복수의 대상물이 될 수 있다.
강호의 고민은 깊어갔다. 그는 진성 리사장와 미나의 과거에 대해서 상세하게 조사하라고 메세지를 넣었다.
31
진성을 만난 후 미나의 시간은 즐거움과 그리움으로 가득찼다. 세간의 눈길을 피해 미나는 매일 저녁 진성이와 만났고 뜨거운 밤을 보냈다. 본가집 엄마 같은 보모에게 아이를 맡겨놓았기에 미나는 걱정없이 밤을 샐 수 있었고 유치원에 다녀온 아이와 놀다가도 시간만 되면 밖으로 나갔다.
미나가 집에 와서 하는 일은 단 한가지, 보모가 타주는 커피를 맛보는 일이다. 봉다리커피가 아닌 보모가 직접 갈아서 타올리는 커피는 그 향과 맛이 일품이다. 외국인에게서 배웠다더니만 보모가 타올리는 커피는 맛이 달랐다. 주회장도 생전에 보모가 타준 커피맛이 제일이다고 항상 칭찬했다.
오늘도 샤워하고 거실에 나오자 보모가 커피를 타들고 들어왔다. 집안에는 금시 구수하고도 향긋한 맛이 가득 차넘쳤다.
“사모님, 커피를 마시세요.”
“네, 이모, 감사해요.”
미나는 보모의 손에서 커피를 받아들었다.
“앉으세요. 이모.”
미나가 맞은켠 쏘파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어찌…”
“아니, 왜 그래요. 한집안 식구끼리, 지우도 안 왔는데 앉으세요…”
미나가 수줍게 사양하는 보모에게 랭장고에 가서 직접 음료까지 따다 주면서 말했다.
“나는 이모가 있어서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어요. 아버지 엄마가 돌아간 후 사실, 전 너무 고독했지요. 남편이란 사람은 랭혈동물이고 가령 우리 지우가 없었다면 전 자살했을지도 몰라요.”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미나의 모습이다.
“다행히 이모가 우리 지우를 잘 키워주니까 얼마나 좋은지, 감사해요. 이모.”
“아니, 저야 뭐.”
보모가 몸둘 바를 몰라하였다.
지우에게 정이 들어 한시도 지우 곁을 떠나지 않는 보모였다. 지우의 요구를 백프로 만족시켜주면서도 적당한 선에서 가르치기도 하고 례의도덕을 심어주는 모습이 미나에게는 너무나도 인상적이였다.
“일이 잘 풀린 것 같아요.”
미나가 불현듯 말했다.
“그래요? 무슨 일?”
“사실, 혼자만 알고 있으세요. 저의 남편이 돈을 300만원을 남한테 꿔준 적이 있거든요.”
“300만원이나?”
보모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근데, 차용증이 없어졌어요.”
“와! 그럼 어쩌지요?”
보모가 걱정스레 두손을 가슴에 모아쥐였다.
“다행히 건설은행의 안과장이 방법을 대겠다고 했어요. 지난번에도 전화 왔는데 걱정 말라고 하더군요. 인사를 톡톡히 할 준비를 하라는 걸 보니 잘되고 있는 것 같아요.”
미나의 눈은 천진란만한 소녀의 눈처럼 빛났다. 모든 것이 생각 대로 되고 있고 근심걱정이 다 풀려간다고 생각했다.
“정말 잘 됐네. 제발 그렇게 됐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저는 우리 지우가 건강하게 자라고 사모님께서 좀 무람된 말이지만 이제 좋은 남자를 만나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보모가 두손을 가슴에 모으고 기도하듯 축복하였다.
“그런 날이 올가요? 이모?”
미나가 얼굴에 행복한 미소를 가득 담고 보모에게 물었다. 보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화벨이 울렸다. 건설은행의 안과장이였다. 미나가 전화를 받았다.
“좋은 일이 있는데. 이루빠에서 잠간 만나볼가?”
안과장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돼요. 약속이 있어요”
“약속? 중요한 약속이?”
의외라는 듯 안과장의 목소리가 불편하게 들렸다.
“그래요. 거긴 안돼요.”
“ㅎㅎㅎ… 그럼 300만원도 싫고?”
안과장은 싫으면 그만두라는 말투를 던져왔다.
“아니, 다른 중요한 일이 있으니까 그러는 거지.”
안과장이 이루빠에 오라는 것은 몸을 섞기 위해서 임을 너무나도 잘 아는 미나였다. 진성이를 만난 후부터 그는 이루빠에서 몸을 섞었던 기억들을 다 날려버리고 싶었다.
“홀리데이호텔 커피숍에서 봐요. 지금 갈 거니까.”
“좋아, 그래, 그러자고.”
미나가 말하자 저쪽에서 전화를 끊었다.
미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건설은행 안과장이 보자고 하니까 나가 보겠어요. 아마도 좋은 일이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저에 대해서 누가 묻거나 우리집에 대해서 물으면 아무 것도 모른다고만 말해주세요.”
“알았어요. 사모님 전 정말 아는 게 없고… 말 할 줄도 잘 몰라요.”
보모의 수줍은 말투를 뒤로 하고 미나는 밖을 나갔다. 최신형 벤츠 승용차 한대가 스르륵 굴러왔다. 진성이가 사준 최신형 벤츠였다.
“사모님, 어데로 모실가요?”
미나에게 뒤좌석 문을 열어주면서 운전기사가 공손하게 물었다.
“홀리데이호텔로 가요.”
미나는 말을 마치고 눈을 감았다.
안과장과의 관계도 마무리해야 될 시점에 와있기 때문이였다.
32
태평양실업 왕도의 사무실에는 조변호사와 사채업자 장보가 마주앉아 차를 마시고 있다. 골목소식을 듣고 싶을 때면 왕도는 어김없이 두 사람을 별도로 불러들였다.
“진성그룹에 대해서는 새로운 소식이 없는가?”
왕도가 두 사람을 번갈아보며 물었다.
“아직 그렇다 할 만한 소식은 모르긴 하지만…”
조변호사가 입을 열었다.
“회장님도 동방편직의 문수와 정호가 나타난 것은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래, 알고 있어.”
왕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문수는 주회장의 하수인인 사채업자 민혁이라는 자의 등살에 못 이겨 잠수했댔고 정호는 장보에게 잡히기까지 했던 놈입니다.”
장보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수상한 점이 한가지 있습니다.”
“속 터지게 늘어놓지 말고 빨리 말해.”
왕도가 담배를 피워물며 재촉하였다.
“장보가 정호를 잡았던 날, 정체 모를 사람이 나타나 정호를 구출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장보네 일행을 족쳐댔을 뿐만 아니라 장보의 호주머니에 있던 차용증을 가져갔고 그리고 돈을 받지 않는다는 서약에 장보의 손도장까지 찍었습니다.”
“그건 다 아는 일이 아닌가? 변호사들이란 서론이 너무 긴 것이 흠이야, 거두절미하고 본론만 말하면 얼마나 좋아…”
왕도가 피여오르는 하아얀 담배 연기 사이로 조변호사를 보면서 핀잔주듯 말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조변호사가 왕도 회장 쪽으로 몸을 쏠리며 말을 이었다.
“주회장 역시 장보처럼 당했을 수 있습니다.”
“당했다?”
왕도의 얼굴이 굳어져갔다.
“육체적으로만 당한 게 아니라 주회장도 차용증을 잃어버렸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리고 장보처럼 본의 아니게 이 돈을 포기한다거나 이미 다른 형태로 돈을 받았으니 무효되였다는 계약서에 사인했거나 손도장을 찍었겠지요. 죽기 전에…”
들어보니 조변호사의 론리가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였다.
“넌 어떻게 생각하니?”
왕도가 눈을 디룩거리며 생각에 잠겨있는 장보에게 물었다.
“제가 보기에도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지난번 홀리데이호텔에서 문수와 정호를 만났을 때 그들이 너무나도 당당했습니다.”
“그래?”
“네. 그리고 저희들이 달려갔을 때 민혁의 패들도 와있었습니다.”
“민혁이면 주회장과 안과장이 키우는 얘를 말하는가?”
왕도가 물었다.
“맞습니다. 주회장과 안과장의 최측근이라고 할 수 있지요.”
조변호사가 대답했다. 조변호사가 말을 이었다.
“그날 써빙을 했던 복무원에게 물어보았더니 민혁이의 앞에서 문수는 너무나도 당당하였다고 합니다.”
“당당하다?”
“네. 빚에 쫓겨다니던 사람이 아니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민혁이가 차용증을 갖고 오면 당장 돈을 주겠다고 말하더랍니다.”
“문수가?”
“네.”
“그래서?”
“그런데 민혁이가 차용증을 못 내놓더랍니다.”
“못 내놓았다?”
왕도의 미간이 찌프려졌다. 못 내놓을 리유가 없다.
“너희들과는 어떻게 말했는지 다시 한번 들어보자.”
왕도가 몸을 쏘파에 던지면서 눈을 감았다.
“저희들과도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차용증을 가져오라고…”
장보가 대답했다.
“정호가?”
왕도가 감았던 눈을 뜨며 되물어오자 장보가 지체할 사이 없이 대답했다.
“아니, 문수가 말했습니다. 차용증을 가져오면 인츰 주겠다고 했습니다.”
“아니, 상세히 말해주십시오. 그 사람의 표정이라던가 말투 등등.”
조변호사가 자세를 고쳐앉으며 물었다.
“당시 정호는 우리를 보자마자 당황한 기색이였습니다. 그러나 문수란 사람은 아주 태연한 자세로 나서면서 무슨 일인가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정호가 저희들의 돈을 꿔간 걸 갚지 않았다고 했지요. 그랬더니만 돈을 꿨으면 갚아야지 하면서 얼마나 되는가고 묻더구만요.”
장보가 당시 상황을 되돌이켜면서 말했다. 장보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서 제가 15만원, 아니, 저의 끊어진 이발까지 포함해 20만원이라고 했지요. 그랬더니 얼마되지 않네 하면서 자기가 대신 물어주겠다고 했습니다.”
“문수가 그랬단 말입니까?”
조변호사가 다급히 물었다.
“네.”
장보가 대답했다. 장보가 꿀꺽 침을 삼키더니 말을 이었다.
“문수는 휴대폰을 꺼내들고 위챗으로 보내줘도 되는가 묻더구만요. 그래서 제가 아무렇게나 보내달라고 했는데 보낼 것처럼 하던 사람이 차용증이 있는가고 물었습니다.”
“차용증?”
왕도가 두눈을 매섭게 쪼프렸다.
“네. 그래서 없다고 했더니만 차용증을 가져오면 주겠다고 하면서 차용증이 없이는 줄 수 없다고 하더구만요.”
잠시 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뭔가를 알면서도 꾸미는 듯한 느낌 같지 않습니까?”
조변호사가 물었다.
“아, 네, 그렇습니다. 얼굴에는 아주 겸손하고 진실한 마음이 씌여져있었습니다만 어찌보면 비웃는 듯한 기운을 느꼈습니다.”
조변호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제가 좀 강하게 나왔거든요. 그랬더니만 그들은 더욱 강하게 나왔습니다. 사기, 협박, 랍치죄로 고소하겠다고 법정에 가서 만날 생각인가고 하더군요.”
장보가 막무가내라는 듯이 입을 다셨다.
“왕회장님, 차용증에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바로 주회장의 차용증에…”
장보의 말을 다 듣고난 조변호사가 긍정적으로 말했다. 왕도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가령 주회장의 차용증이 민혁의 손에 있었다면 민혁은 들고 갔을 겁니다. 설사 손에 없었다 해도 사람을 시켜서라도 가져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민혁은 문수가 차용증을 내놓으라고 하자 내놓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언제 가져오겠다는 말조차 못했습니다. 말하자면 주회장 손에 있던 차용증은 정호가 장보에게 남겼던 차용증처럼 사라졌습니다. 최소한 행방불명이 되였을 것입니다.”
왕도와 장보도 조변호사의 론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실종됐던 문수가 당당하게 나타난 것은 차용증이 실종됐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조변호사의 론리정연한 추리에 왕도와 장보는 동감했다.
“그렇다면 주회장의 차용증과 제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사람이 누가 있지?”
왕도가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누구도 선뜻 말하지는 않았지만 장보와 조변호사는 거의 한결같이 ‘안과장’이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33
이른 아침, 실내에서 조깅을 하던 공안국 부국장 강호는 강표로부터 폭발적인 정보를 전해 들었다. 주회장의 300만원짜리 차용증이 분실되였다는 소식이였다.
“알았다. 만나서 얘기하자, 당장 갈게.”
선글라스를 끼고 사복차림을 한 강호는 혼자서 강표가 정한 약속 장소에 나타났다. 새로 오픈한 ‘몽태’비지니스호텔 301방이였다.
“안녕하십니까?”
강호가 나타나자 강표가 각듯이 인사를 올렸다.
“자, 말해라.”
강표는 홀리데이호텔에 문수와 정호가 나타났던 일이며 사채업자 민혁이와 장보가 돈 받으러 나타났다가 차용증을 보여주지 못해 두손 들고 돌아간 일이며 안과장과 민혁이가 300만원을 받기 위해 잃어버린 차용증을 새로 만들려고 하는 것 같다는 등 이야기들을 상세하게 전해주었다.
“그런데, 이건 누구에게서 들은 이야기니?”
강호가 정보의 함금량을 확인이라도 할 듯이 조용히 물었다.
“좀, 말하기가 그렇습니다만… 제가 갖고 있는 정보라인이 따로 있습니다.”
강표는 가려에게서 전해들었다는 말은 차마 하기가 싫었다. 말하다 보면 불륜동영상으로 가려를 협박했다는 말까지 흘러나와야 하기 때문이였다.
“건설은행 안과장과 절친한 관계의 녀인으로부터 들었습니다.”
강호는 짐작이 갔다. 지난번 이루빠에 함께 나타났던 녀인일 것이다.
“그 녀자는 무얼 하고 있는데…”
“민혁의 회사에서 비서 일을 합니다.”
“민혁? 주회장 밑에서 사채업을 하는 사람?”
“네. 제가 장보의 지시를 받고 움직이는 별동대임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강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왕도 회장과 조변호사 그리고 장보가 만났습니다. 결과는 차용증 분실이였습니다.”
강표가 미끼를 던지듯 결과부터 말했다.
“상세하게 말해라.”
강호의 눈길이 매서워졌다.
“일전에 사채업을 하는 장보는 돈을 꾸고 달아났던 정호를 붙잡았습니다.”
“그래?”
“호텔에 가둬놓고 정호를 괴롭히며 리자까지 다시 계산하여 새로운 차용증을 쓰게 하고 손도장까지 찍으려고 하는데 정체 모를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강호가 수첩을 꺼내들었다.
“그 사람은 장보와 그 일당을 모두 때려눕히고 정호가 남겼던 차용증은 그 자리에서 불태워버렸고 모든 빚을 무효화한다는 각서에 장보의 손도장까지 받아가지고 갔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누군데?”
강호가 수첩에 메모하다가 잠간 멈추고 물었다.
“모릅니다. 누구도.”
강표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정호가 나타날 수 있었던 리유는 바로 사채를 꾸면서 남겼던 차용증이 없어졌기 때문이라는 말이지?”
“네.”
강호의 분석에 강표가 인츰 대답하였다.
“그렇다면 정호와 문수는 무슨 관계니?”
강호가 물었다.
“문수와 정호는 결의형제이기도 하고 거래업체이기도 합니다. 돈을 빌릴 때 련대책임을 진 사이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강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련대책임이란 보증을 선 관계로서 둘 중 한 사람이 빚을 갚지 못할 경우, 보증을 선 사람이 갚아야 한다. 사채업자 민혁이와 장보가 문수와 정호를 피터지게 찾고 있는 리유가 보였다. 정호와 문수 둘 중에서 한 사람만 잡아도 줄기 따라 열매가 나오듯이 줄줄이 풀려갈 수 있었기 때문이였다.
“아까 문수가 300만원짜리 차용증을 내라고 했을 때 민혁이가 차용증을 못 내놓았다고 했지?”
강호가 메모지에 민혁, 주회장 두 사람의 이름을 써놓고 물었다.
“네. 사실 김문수는 300만원 때문에 잠수했댔습니다. 그러다가 깜짝 나타났지요.”
“음-”
강호가 짧은 한숨을 토해냈다.
“어제 조변호사랑은 어떻게 분석했다고 하던?”
“가능하게 주회장이 남긴 차용증이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습니다.”
강호도 고개를 끄덕였다.
“문수가 활개치며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주회장에게 넘겨주던 300만원짜리 차용증이 없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보기엔, 아니, 너의 생각에는 가장 큰 혐의를 갖고 있는 사람이 누구니?”
강호가 떠보듯이 물었다.
“주회장과 가까이에 있던 사람이겠지요. 장보 형은 건설은행의 안과장을 짚던데요. 장보는 저에게 더 깊게 달라붙어 안과장을 파보라고 하였습니다.”
강표의 입에서 알맹이를 다 알아낸 강호의 답답하던 가슴은 활짝 열리는 것만 같았다. 섬광처럼 번뜩이는 추리능력으로 강호는 주회장의 죽음이 300만원과 관계되며 주회장은 타살 당했다는 것을 더욱 확신하게 되였다.
“안과장과 민혁이 만났다면서? 심각한 얘기들도 오고갔을 건데…”
강호가 눈웃음을 지으며 담배를 한대를 꺼내 강표에게 권했다. 숨기려하지 말고 몽땅 털어놓으라는 암시이기도 하였다.
“네, 맞습니다. 300만원을 찾으면 나누어 가지자고 하더랍니다. 주회장의 마누라까지 셋이서.”
강표가 가려에게서 들었던 얘기를 남김없이 고해바쳤다.
“알았다. 앞으로도 절대 자만하지 말고 장보가 눈치 채지 못하게 하는 한편 장보가 부탁한 일은 더욱 최선을 다해서 해라. 그리고 혹시 나 몰래 무슨 일이 생기게 되면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만 있어라. 내가 다 알아서 할 거니까.”
“네, 알겠습니다.”
강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다시 90도로 경례했다. 강호와 강표는 30분을 사이두고 호텔에서 빠져나왔다. 청청한 하늘이 파랗게 웃고 있었다.
34
흥양로과 장성로 4거리에 자리잡은 홀리데이호텔은 5성급 호텔로서 국제명류들이 즐겨찾는 1번지이기도 하다.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굽어들면 높이 자란 화분 사이로 영어로 쓴 커피숍 간판이 보인다. 높이 달린 유리창벽을 따라 자리잡은 커피숍은 방음장치가 잘되여있어 다른 좌석에서 말하는 소리는 거의 들을 수 없다.
제일 구석진 곳에 커피 한잔 놓고 마주앉은 건설은행 안과장과 주회장의 마누라 미나는 할 말을 잃은 듯 마주보고 있다.
“더 이뻐졌는데…”
안과장이 너스레를 떨었다.
“용건만 말하세요. 남들의 눈도 있으니까…”
미나의 표정이 조금은 랭랭했다. 안과장은 인젠 남자 녀자로는 만나기가 힘들겠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인간의 심리를 읽는 면에 있어서는 달인인 안과장은 미나에게 분명 좋은 일이 생기고 있다고 판단하였다.
안과장은 여지껏 미나가 잠자리를 거부하는 걸 본 적 없었다. 한밤중에도 부르면 나와서 한바탕 즐기고 돌아가던 녀자가 랭랭해졌다는 것은 분명 원인이 있다. 오늘도 300만원 용건이 없었다면 미나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동방편직의 문수가 나타났소.”
“들었어요. 알 만한 사람들이 다 알더구만요. 이제 공장도 인츰 가동한다면서요.”
안과장의 말에 미나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주회장이 문수에게 300만원을 꿔줄 때 민혁이가 현장에 같이 있었댔소.”
안과장이 미나의 얼굴 표정을 지켜보면서 말했다.
“민혁이라면 그 사채업을 하는 젊은 청년?”
“양. 민혁이는 문수가 직접 사인하는 것까지 보았다오.”
“그랬겠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 차용증이 없어졌으니까 두달이 다 지나가도록 찾을 방법이 없잖아요.”
미나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방법이야 있지. 증명인이 있는데. 민혁의 말에 따르면 차용증은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차용증과 똑같은 형식으로 되여있었다오.”
“그렇다 해도 문수의 친필 사인 같은 게 있어야 할 건데 문제는 그것이 없잖아요.”
“그렇지. 그러나 나에게는 방법이 있다는 거.”
미나의 얼굴에 미세한 변화가 일어났다.
안과장이 말을 끊었다.
“무슨 방법인데…?”
미나가 낮은 소리로 물었다.
“문수는 우리 은행에 와서 대부금을 여러 번 맡았댔소. 그 파일을 들춰보면 그의 사인 필체가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을 거요. 우리는 그것을 모방하여 차용증을 새로 만드는 거요.”
“위법이 아닌가요?”
“물론 위법일 수도 있겠지. 그러나 이건 국가나 개인의 돈을 갈취하는 게 아니고 자기가 응당 받아야 할 돈을 받기 위해 만든 것이니 일이 끝나는 즉시로 페기해버리면 그만이요.”
안과장의 어조는 확신에 차넘쳤다.
“그렇게 하면 찾을 수 있을가요?”
돈을 찾을 수 있다는 생각에 미나의 말투가 떨려왔다.
“찾을 수 있지.”
안과장이 확신적으로 대답하였다.
“지금의 행동을 보면 문수는 자기가 남긴 차용증이 없어진 걸 알고 있소. 그러니까 우리는 위조한 차용증을 공증처에 가서 공증하고 문수를 잡아다가 밀어부치는 거요. 차용증을 인제야 겨우 찾은 듯이 나서면 문제 없을 거요.”
안과장의 말은 미나가 생각하기에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다. 채무자는 자기가 돈을 꿔간 기억이 있기에 날자와 액수가 다 맞으면 차용증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
“그럼 그렇게 추진해주세요. 인사는 톡톡히 할 거니까…”
미나가 흔쾌히 대답하였다.
“인사를 하는 문제가 아니고…”
안과장이 미나 앞에 종이와 펜을 내놓았다.
“이건 무엇이지요?”
미나가 의아해 물었다.
“계약서…”
안과장이 대답하였다.
“계약서?”
“중대한 일인 만큼 계약서가 필요한 것 같아서…”
미나가 계약서를 들고 훑어보았다.
“아니, 절반을 나눠가진다고요?”
미나가 덴겁한 표정을 지었다.
안과장이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300만원 중에서 절반을 나눈다는 게 이게 너무한 것 아닌가요?”
미나의 말투가 매서워졌다.
“내가 가지려는 게 아니라 민혁의 요구요. 돈을 꿔준 날자도 민혁이가 알고 있고. 차용증을 위조하려는 생각도 민혁이가 해냈소. 모든 총대를 자기가 메야하는 상황에서 절반씩 나누어가지는 건 기본이라고 하더구만.”
“세상에!”
미나가 기가 막혀 입을 딱 벌렸다.
“원래는 60%를 달라는 걸 내가 설복해서 50%씩 하자고 했소.”
미나는 할말을 잃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안된다고 물러날 수도 없다. 150만원이라도 건져야 한다. 운이 좋으면 땅을 빼앗아 진성그룹에 넘겨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미나는 안과장이 내놓은 하얀 서류를 다시 한번 훑어보았다. 문수에게서 받아온 돈 300만원 중 50%를 수고비로 준다는 내용만 있을 뿐 차용증을 위조한다거나 어떤 방법으로 한다는 내용 같은 것은 없었다.
“저는 위조한 것도 모르고 위조하라고 말한 적도 없어요. 오직 저의 남편이 남긴 차용증을 찾을 뿐이예요. 그러니 앞으로 차용증 때문에 불거지는 일들은 전적으로 당신이 책임져주세요.”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미나는 미리 침을 놓았다.
“걱정마오. 이런 일을 한두번 해본 것이 아니니까.”
안과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나는 하얀 손에 펜을 잡고 계약서에 사인했다. 안과장은 사인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일어났다. 예전 같으면 잠자리를 함께 하자 요구를 제기할 그였지만 금전관계가 얽힌 이 마당에서는 그런 생각도 가뭇없이 사라졌다. 안과장과 미나가 서로 모르는 사람인 척 몇분 간격을 두고 사라지자 등을 돌린 채 컴퓨터 게임을 하던 사람이 가발을 벗으며 일어났다.
“안과장과 미나가 방금 떠났습니다.”
안과장 추적에 나선 강표였다.
(계속)
[허강일 추리소설] 도시는 알고 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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