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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추억 3] 아버지로 되던 그날의 긍지

2017-01-25 길림신문 朝闻今日

글/리진욱(연길)


한 나젊은 사나이에게 있어서 아버지란 호칭은 성숙과 완정의 의미를 담고있어서인지 아버지로 되던 날 나는 저도 몰래 어깨가 으쓱해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바로 52년전 룡해의 11월 27일은 내가 아버지로 되던 잊지 못할 긍지의 날이였다.


오후부터 푸실푸실 내리던 첫눈이 어둠이 깃들자 더욱 기승을 부리며 펑펑 쏟아지고있었다. 아직도 해산날이 한주일은 잘되리라던 안해가 배 아프다며 빨리 조산사 아주머니를 모셔오란다. 나는 들뜬 마음으로 한달음에 눈길을 헤치고 조산사 상씨 아주머니를 모셔왔다. 


조산사 아주머니는 자상한 진료끝에 확실히 몸 풀 징조라고 했다. 물을 끓이라고 해서 부엌아궁이에 장작개비를 지펴놓았다. 그런데 양수는 벌써 흘러나왔건만 학수고대하는 놈은 종시 감감무소식이였다. 도리여 산모의 앓음소리는 내 가슴을 후벼냈다.“초산이 돼서 안되겠소. 어서 김선생을 모셔와야겠소!” 사태의 엄중성을 감안한 나는 조산사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눈길에 엎어지면서 정신없이 뛰여가서 향병원 김의사를 모셔왔다. 김의사도 별다른 방책과 치료는 없었지만 그를 모셔온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위안을 느낄수 있었다.


산모는 몇번이고 전신의 힘을 모아 야릇한 소리를 지르며 모지름을 썼으나 별로 차도가 없었다. 김의사는 나더러 산모를 부축해 껴안으라고“지시”했다. 나는 안해를 다정다감하게 그리고 내 기를 몰부어 꼬옥 껴안았다. 때맞침이랄가, 그런 법이랄가,드디여 용케도 아기를 순산했는데 바로 저녁 8시 정각이였다. 모두들 안도의 숨을 내쉬는데 산파아주머니가 아들이라고 하였다. 나는 속으로 환성을 질렀다. 


그런데 그 기쁨도 잠시, 태여난 애기는 고고성을 울리지 않았다. 조산사는 물론 김의사까지도 인공호흡을 시킨다, 천으로 애기 입에서 오물을 씼어낸다 하면서 긴장하게 서둘렀건만 여전히“무성세계”였다. 바로 이때 김의사가 애기 두 종아리를 잡아 거꾸로 추켜들고 잔등을 몇번이고 찰싹찰싹 치는것이였다. 나는 속으로는 “어떻게 이럴수가?” 하며 언짢아했으나 어쩌는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게 웬 영문인가! 머얼건 물을 토하던 우리 아기가 마치 황소의 영각소리를 방불케 하는“응아-!” 하는 웅글진 소리를 내지 않겠는가! 나는 드디여 속으로“죽지도 았았고 벙어리도 아니구나!”하며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하지만 더는 진정할수가 없어서 집을 뛰쳐나갔다. 눈 덮인 학교운동장은 고요했다. 나는 아버지로 된 무한한 긍지감을 붙안고 주먹을 추켜들고 높이 솟구치기도 하고 눈우에 구을기도 하면서“나도 아버지로 되였다!”고 웨쳐댔다. 그러다가는 아예 눈우에 네각을 뻗고 누워서 하늘을 우러러“지금부터 나는 아버지다!”를 높이높이 웨치며 부푼 마음을 달래였다. 그저 어깨가 으쓱해지면서 기쁘기만 할뿐 아버지로서의 의무와 책임 같은것들은 아예 사색할 겨를이 없었다.


며칠후, 나는 부친님의 분부대로 별 규(奎)자 돌림에다가 새별마냥 밝고 바르게 살라고 바를 정자(正)를 항렬돌림앞에 붙여서 리정규라고 이름을 짓고는 호적에도 올림으로써 진짜 아버지로, 완정한 가정의 세대주로 부상하였다. 이때로부터 호주라는 중임을 떠메고 아버지로서의 의무와 책임으로 마치 새봄 맞는 감농군이 일년지계를 세우듯 자식농사의 10년지계 20년지계를 설계하기 시작했다. 


나어린 아들을 두고 안해는 교원이 아니면 가수로, 나는 내가 이루지 못한 작가의 꿈에 미련을 두었는데 모두가 부모된 우리 부부의 즐거움이 아닐수 없었다. 유치원생으로 되자 아들애의 지청구대로 작은 초록색“군모”에 빨간색 비닐로 오각별을 달아주었다. 후에는 부대간부로 있는 친구에게 부탁하여 진짜 오각별을 달아주었더니 자나깨나 모자를 벗지 않았고 꼬마군대 행세를 하는 모습이 실로 대견스러웠다. 


소학생으로 되면서 나는 아들애를 데리고 아침달리기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9년동안이나 견지하였다. 우리 부부가 교원이여서인지 아들애는 어려서부터 독서에 류달리 흥취가 있었다. 우리가 퇴근할 때면 쫑드르 달려와서는 손에서 신문 혹은 잡지를 잡아채 읽어보기가 일쑤였고 내가 현성으로 출장 가기라도 하면 아동도서 부탁이 간곡했다. 


아들애가 독서에 열중했기에 그의 작문실력이 눈에 띄게 제고되였다. 중학교 2학년 때 학급 담임(한채순)선생이 조선어문선생이 넘겨준 아들애의 작문“우리 반주임선생님”을 읽으면서 눈물까지 흘렸다고 하였다. 중학교를 다닐 때 아들애는 현급“3호학생”이 되였고 룡정중점고중에 가서는 전 학년(6개 학급) 수학경연에서 2등을 했다. 


졸업을 앞두고 대학입시전에 공군신체검사에 합격되였고 문화과시험과 정치심사에서 모두 무사통과되여 뜻밖에도 공군학원에 합격,1984년 8월에 입대하였다. 공군비행사로부터 사장급에 이르는 28년간 2등공 2차, 3등공 4차를 세우기까지 했다. 큰아들이 전업한 다음에야 안 일이지만 세번이나“구사일생”으로 죽을 고비를 용케도 넘었다고 하였다. 


류수광음이라고 오늘(11월 27일)이 바로 우리 큰아들의 52살 생일날이다. 저녁 8시에 나는 한생의 동반자, 내가 극진히 사랑하는 안해의 팔을 끼고 쏘파에 앉아서 후회없는 인생살이에서 당년에 어머니로 된 자부와 당년에 아버지로 된 긍지로, 가장 고통스러웠던, 가장 즐거웠던 그날 그 시각을 추억하면서 흐뭇한 기분으로 전화를 들었다.


지난 2013년에 공군비행사(대좌급)로부터 성의 간부(길림성지방지편집위원회 부주임, 부청급)로 전업한 큰아들에게, 근 30여년간 언제나 가슴속에 근심걱정을 묻어두고 통화하던 때와는 달리 후련한 마음가짐으로 생일축하의 전화를 했다. 무탈하게 잘 자라줘서 고맙고, 가문에서 가장 큰일을 하고 가장 높은 사람으로 되여주어 고맙고, 딸을 북경대학 박사연구생으로 키워주어 고맙다며, 실로 뜻밖의 천륜지락을 향수하고있다고 전화를 했다. 비록 황혼인생이라지만 그때 그 시각의 아버지, 어머니로 되던 때의 그런 긍지의 심정으로 전화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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