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창고] 정신 차리고 보니 목에 선명한 키스자국…
유난히 술자리가 많은 12월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마시고 또 마시다 보면 별별 일이 다 생기고 감추고 싶은 흑역사도 생긴다.
술 먹고 나서 어느 순간부터 기억이 나지 않는 현상을 의학용어로 블랙아웃(blackout)이라 하고 우리는 ‘필름이 끊겼다’고 말한다. 리건 웨더릴(Reagan Wetherill)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교수는 이런 현상은 알코올이 대뇌 측두엽 해마 부분에 작용해 뇌의 정보 입력 과정에 이상을 일으킬 때 발생한다고 했다. 술을 마시면 간에서 분해가 되는데, 술이 너무 많이 들어오면 미처 분해되지 못한 알코올이 혈액을 따라 기억을 저장하는 해마로 가서 전기적인 신호 전달을 교란시켜 정보 입력이 안 된다는 뜻이다. 알코올 독소인 아세트알데히드(acetaldehyde)가 세포와 세포 사이의 신호 전달 메커니즘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러니까 술을 마신 뒤 기억이 드문드문 나거나 아예 안 나는 이유는 기억을 꺼내지 못해서가 아니라 아예 저장된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야비하게도 너무 취해 항거 불능 상태가 된 여성의 의사와 상관없이 간음이나 추행을 하면 준강간죄로 고소를 당한다. 그러나 나쁜 남자들은 성관계를 가진 것은 맞지만 여자도 제정신인 상황에서 동의한 줄 알았다고 반박한다. 이때 여자는 의식이 있을 때 한 일을 나중에 기억하지 못하는 일시적 기억상실증인 블랙아웃일 가능성도 있다. 술에 떡이 됐어도 성관계 요구에 응했고 적극 저항하지 않았다면 강간이라 단정하기 어렵다고 어떤 똑똑한(?) 판사님이 판결을 내렸다. 반대로 약아빠진 여자는 화간(和姦)을 한 후 마음이 바뀌어 필름이 끊겼다고 우기기도 한다.
술이 원수다. 아침에 눈떴을 때, 내장까지 다 토해 꼴사나운 흔적이 있고 머리는 깨질 듯 아프며 속은 바늘로 찌르는 것같이 쓰리다. 지난밤의 기억이 가물가물하고 집에 언제, 어떻게 돌아왔는지 무슨 추태를 부렸는지도 도무지 알지 못한다. 로버트 내시(Robert Nash) 영국 서리(Surrey)대 교수 조사 결과, 술 먹고 완전히 필름이 끊긴 경험이 있는 대학생은 24%, 부분적으로 끊긴 일이 있는 대학생은 37%로 나타났다. 우리나라도 성인 중 33%가 블랙아웃 현상을 겪었다는 통계가 있다. 자기가 저지른 일을 모르고 있다는 안타까운 단기기억 휘발 사태다.
그래도 그건 약과다. 잠에서 깨어 보니 낯선 침대, 처음 보는 벽지에 당황한다. 정신 차리고 보니 목에 선명한 키스 자국에 머리카락은 헝클어지고 치마도 들춰진 채 모르는 남자와 나란히 누워 있다. 그 와중에도 스타킹이 그대로니 아무 일도 없었을 거라고 애써 합리화를 시킨다. 남자 역시 마찬가지다. 옷은 다 벗겨져 있고 사정(射精)한 표시에 아랫동네는 쓰라리고 온몸이 뻐근하다.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안 봐도 비디오지만 사정을 모르겠으니 답답하지 않을 수 있나.
술집에서 나와 노래방에 간 것까지는 생각이 나지만 모텔에서 성관계를 한 기억이 깜깜절벽이라면 환장할 노릇이다. 밤은 어땠을지 모르지만 아침은 그리 로맨틱하지 않다. 최소한 감흥이나 쾌감의 순간이 기억나야 뭔가 한 것 같고 재미를 봤다는 성취감이 있을 텐데 그저 기분 나쁘고 꺼림칙할 뿐이다. 자존심을 내팽개치거나 생면부지의 아무하고나 잔 것이라면 더더욱 불쾌하기 짝이 없다. 서로 어색한 아침, 자책을 해보지만 때는 이미 삼팔선을 넘어가버렸다.
시인 보들레르는 “노동은 나날을 풍요롭게 하고 술은 일요일을 행복하게 한다”고 했다. 잘 마시면 약이지만 잘못 마시면 독이 되는 것이 술이다. 필름 끊겨도 좋으니 아주 편한 내 집에서 사고 치는 게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