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땅에 헤딩 - 20년간 디자인이란 한우물만 파며....
— 장춘시장천광고디자인쎈터 사장 윤장천의 창업이야기
"성인대 고위급 간부로 재직중이던 아버님은 나에게 좋은 일자리를 마련해줄 능력이 충분했지만‘내 도움을 바라지 말아라, 너의 앞길은 너절로 개척해나가라’고 늘 말씀했다. 나 또한 내가 좋아하는 디자인 업종에서 나의 능력을 증명하고 싶었다."
1995년도에 동북사범대학 미술전업을 졸업하고 학교 미술교원, 신문사 디지이너로 있다가 1997년에 갑자기 사표를 내고 창업의 길에 뛰여든 장춘시장천광고디자인쎈터 사장 윤장천씨는 이렇게 말문을 떼면서 자기의 창업이야기를 시작했다.
디자인실 직원들과 함께 있는 윤장천 사장
자전거- 오토바이- 자동차…그의 창업궤적
1990년대말, 그 때 장춘시에는 우리 민족 식당들이 오픈의 붐을 일으키고 있을 때였지만 우리말 광고 디자인은 공백이였다. 이런 상업기회를 보아낸 그는 우리말 광고디자인 령역을 개척하리라 작심했다.
그는 아침시장에 가서 물건을 되넘겨 팔며 돈을 모아 컴퓨터와 프린터기를 마련했다.
창업준비를 마친 그는 장춘시 골목골목을 두발로 걸어다니며 조선족식당들을 찾아 메뉴판을 설계해주겠다고 자진해나섰다.
"처음에는 누구도 믿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무료로 해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요행 메뉴 몇개를 받아왔다. 나는 메뉴의 내용을 파악한 후 컴퓨터로 조선족 풍격의 메뉴판을 만들었다. 그 메뉴판을 식당주인들에게 보이니 좋아하며 더 만들어달라고 했다."
이렇게 그는 창업의 첫 스타트를 뗐다. 그가 디자인을 한다는 소문이 식당주인들을 통해 한입 건너 두입 건너 퍼지면서 메뉴판 주문이 줄지어 들어왔다.
"수입이 생기니 중고 자전거 한대를 샀다. 내 힘으로 벌어서 자전거 한대 갖춘 것만 해도 너무 뿌듯했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 장춘에서 유명한 조선족식당인 정자식당 사장이 입소문을 듣고 그를 불렀다. 정자식당의 메뉴판과 대형광고판을 만들어달라는 주문이였다. 그것이 기회였다. 그는 조선족특색이 물씬 풍기는 대형광고판을 만들었다. 그 광고판이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면서 그의 시장은 점점 더 넓어졌다.
1998년 그는 정식으로 자신의 광고디자인실을 오픈했고 그의 디자인실은 장춘에서 유일하게 조선족특색으로 설계하는 디자인실로 이름나기 시작했다.
그는 그 때 한창 장춘에서 인기를 끌던 락동개고기마을의 김시자식당의 요청을 받고 마을 부근에 설치할 강철구조 광고판을 설계제작하던 중이였다. 그의 자전거도 오토바이로 바뀌여졌다.
2000년을 전후로 장춘에도 노래방이 서기 시작했고 그 붐을 타고 그는 노래방 간판 제작을 비롯한 노래방에 필요한 모든 디자인을 해주었다. 그 때는 노래방과 식당이 성업중이여서 그의 수입은 톡톡했다. 2002년에 그는 자기가 번 돈으로 자신의 제일 첫 자동차인 봉고차 한대를 마련했다.
식당에 필요한 건 다 만든다... 원스톱서비스
"식당의 메뉴판을 만들다 보니 광고판 주문이 들어왔고 광고판을 만들다 보니 실내인터리어 주문이 들어왔다. 우리 회사에 오면 식당설립에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을 제작할 수 있다. 지어 일회용 그릇과 저가락, 냅킨까지도 만들기 시작했다."
초기에 메뉴판 설계, 광고기획만 하던 그의 업무범위는 점점 더 확장되였다. 실내디자인과 인테리어 뿐만 아니라 일회용 저가락과 냅킨제작에까지 확장되였고 인쇄공장도 설립했다.
그의 회사의 단골거래처는 지금 1000여집에 달한다. 십여년 지기 단골거래처도 적지 않다.
창업초기 거래처였던 한일관식당, 작은 식당으로 시작한 한일관은 그 뒤로 4개의 분점을 설립했고 그것을 기반으로 지금은 4성급 박열호텔로 성장했지만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의 회사의 굳건한 거래처다.
장춘 제주도 사우나도 그의 회사의 십여년 지기 단골거래처다. 제주도사우나 주인은 처음에는 문표 디자인과 인쇄를 시켜보더니 거기에 만족되여 간판제작을 주문, 지금까지 사우나가 다섯개 분점으로 성장했어도 사우나의 모든 광고와 인쇄를 그에게 맡긴다.
그의 회사의 업무범위는 학교와 기관들의 문화건설프로젝트에까지 확장되였다.
지금까지 장춘의 십여개 중소학교 교정문화건설프로젝트를 완수했는데 그 디자인과 품질이 인정을 받아 연변지역, 송원지역에서도 기관단위 문화건설프로젝트 주문이 들어오고 있다.
야외 휴가를 즐기고 있는 윤장천 사장 가족
일확천금이란 없다, 티끌 모아 태산이다
"부모의 지원 없이 아침시장에서 사탕을 되넘겨 팔면서 시작해 지금까지 큰 사업성공은 아니지만 한 가족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창업을 해왔다. 또한 사랑하는 안해의 뒤받침이 있었기에 지금의 성과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대해 나는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윤장천씨는 창업의 20년을 돌아보며 창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귀감이 될 만한 보귀한 말 몇마디 남겼다.
"일확천금은 오래가지 못한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작은 돈이 모여 큰돈이 되더라. 우리 회사에서 만드는 저가락, 냅킨은 리윤이 엄청 적다. 하지만 인테리어나 광고판이나 한번 해주면 끝이지만 저가락과 냅킨은 식당에서 날마다 소비하는 물건들이다. 저가락과 냅킨, 심지어 우리 회사에서 부업으로 하고 있는 타자 복사가 나에게 날마다 수입을 가져다준다. 이런 것들이 모여서 큰돈이 된다. "
"내가 지금까지 수많은 단골거래처를 가질 수 있게 된 원인은 바로 신용과 정직을 지켰기때문이다. 고객들을 성실하게 대하고 진실한 나의 마음을 고객이 알 수 있게 해야 한다. 한두번 믿지고 속히워도 괜찮다. 나중에 그것이 다시 돌아오더라."
27세부터 장춘 조선족 광고업계 첫 사람으로 창업을 해온 윤장천씨, 그는 오늘도 래일도 하던 일을 계속하겠다면서 부언한다.
"세상에서 가장 돈 많은 사람보다 가장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되고 싶다."
/길림신문 최승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