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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철국 장편스포츠실화] 챔피언 1965 (12) 새로운 출발/“3종1대”

조글로 潮歌网 2020-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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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일련재

 신철국  장편스포츠실화 

-1965년 길림성축구팀 전국축구 갑급팀련맹경기 우승 실록


연변인민출판사


새로운 출발


장춘역.

“자, 힘을 내라구. 어제도 그랬듯이 나는 오늘도 그리고 래일도 전적으로 자네를 믿네, 믿어.”

“감사합니다.”

“잘 가게.”

“네, 안녕히들 계십시오.”

“승리의 희소식이 있기를.”

“열심히 뛰여보겠습니다.”

“그럼 수고하게.”

“안녕히 계십시오.”

장문해 부성장, 료운주주임(길림성체육운동위원회), 김춘산비서장(길림성체육운동위원회) 등 해당 상급부문 지도자들의 배웅을 받으며 렬차에 오르는 박만복의 가슴에는 한가득 난류가 흐르고있었다.


겨울철훈련동원대회가 끝나면 잠간 장춘에 들려가라는 전갈에 죄를 진 소학생마냥 가슴을 두근거리며 찾아간 박만복을 장문해 부성장은 “허허허…” 소탈한 웃음으로 맞아주면서 친히 차물까지 따라주었던것이다.


“눈에 피가 졌구만. 사람두, 괜찮아. 실패가 있어야 승리도 있을게 아닌가. 허허허…”

“시름을 끼쳐드려서 죄송합니다.”

“죄송하긴. 난 어디까지나 자네를 믿는다니까. 자넨 꼭 우리 길림사람들의 기개를 떨치고말테니까.”

“믿어줘서 감사합니다.”

“그래 색시도 인젠 연길로 들어왔겠지?”

“아니, 그… 그냥 룡정에서…”

“뭐요? 상기도 갈라져있다구? 견우직녀루?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이요?”

“글쎄 전근이 잘…”

“뭐요?”

장문해 부성장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빠른 걸음으로 왔다갔다 집안을 바장이더니 이윽고 테블로 다가와 벌컥 송수화기를 들었다.

“교환수, 성체육운동위원회루 련계해주시오.”

“저, 장부성장동지.”

그 바람에 난처해진 박만복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어쩔바를 모르는데 장부성장은 말없이 그냥 앉아있으라고 손시늉을 했다.

“거 체육운동위원회요? 거기 료주임이 있소? 음, 료주임이요?

나 장문해요. 시간이 있으면 왔다갈수 있겠소? 음, 그럼 기다리네.”

“아니, 장부성장동지. 이, 이러시면…”

“알만해, 알만하다니까. 부부가 서로 떨어져있고서야 어떻게 일을 제대로 할수가 있겠소. 그것도 신혼살림에. 그래 선수들은 로임을 제대로 타나?”

“네.”

“숙식조건이랑은? 장춘에 있을 때보다는 어때?”

“좋습니다. 생각보다는… 아주 훌륭합니다.”

“음… 자네 자식은 몇이지?”

“네, 아들애 하나가…”

“몇살이지?”

“금방 돌이 지났습니다.”

“그래?”

장문해 부성장은 조용히 창가로 시선을 돌리더니 한동안 창밖을 응시했다. 을씨년스러운 바람에 가로수의 잎들이 우수수 떨어져 이리저리 쓸려가고있었다.


“똑똑똑…”

그때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시오.”

중산복의 목깃단추까지 꼭 채운, 훤칠한 키에 기름한 얼굴의 중년남자가 성큼 들어섰다.

“안녕하십니까? 료주임.”

“아니, 이게 박지도가 아니요?”

료운주는 반색하며 박만복한테 손을 내밀었다. 둘이 반갑게 악수를 나누는데 곁에 서있던 장문해 부성장이 입을 열었다.

“박지도가 나를 먼저 찾았다구 욕하지 말게. 내가 부른거니까.

그리구 나하구 이 꼬맹이는 친구라니까. 그것도 딱친구.”

“딱친구?”

박만복은 화끈 얼굴이 달아올랐다.

“쳇, 저하구는 친척인데요.”

“친척? 오, 그렇지, 그래, 친척이지. 운동하는 사람들이니까 당연히 친척이지. 아하하…”

료운주주임의 말에 잠간 얼떠름해있던 장문해 부성장이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순간 료운주주임이 박만복을 향해 우습강스럽게 한눈을 찔끔해보였다…

그날 저녁, 박만복과 함께 식탁을 마주한 장문해 부성장이 몸소 술을 부으며 건배를 요청했다.

“저 술을 못하는데요.”

“그래두 이 술만은…”


1960년, 조선을 방문하여 친선경기를 하고있는 길림성축구팀(흰색유니폼).


료운주주임이 박만복의 옆구리를 툭 쳤다.

“감사합니다.”

눈치를 챈 박만복이 제꺽 자리에서 일어났다.

“승리를 비네.”

“길림성대의 우승을 위하여. 자-”

“건배!”

셋은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드넓은 벌판에 무성하게 자라는 풀

해마다 한번씩 시들었다 살아나네

드세찬 들불에도 타죽지 아니하고

봄바람이 불어오면 또다시 움터나네


문득 장문해 부성장이 빈 술잔을 상우에 내려놓다말고는 박만복쪽으로 머리를 돌리며 시 한수를 읊조렸다.


아득히 머나멀리 옛길을 가리우고

거치른 성 기슭에 파랗게 뻗어있네

오늘은 떠나는 그대를 바래노니

무성한 들풀우에 석별의 정 넘치여라


“하하하, 좋은 시입니다. 기억력도 비상하시군요.”

료운주주임이 연신 감탄을 뽑으며 박수를 쳤다.



“박지도, 당신한테 드리는 선물일세. 알만하지? 시인 백거이.”

그 말에 동감이라는듯 장문해 부성장이 반쯤 눈을 감은채 넌지시 박만복을 바라보았다.

“리백, 두보와 쌍벽을 이루는 그 당조(唐朝)때 시인 말입니까?”

박만복이 무슨 뜻일가 깊이 생각지 않고 입을 여는데 “어디,당조가 아니라 송조지.” 하면서 료운주주임이 벙실거렸다.


“당조가 아니라 송조(宋朝)라구요?”

그 바람에 박만복이 잠간 어리둥절해서 두 사람의 표정을 살피는데 장문해 부성장이 그만 참지 못하겠다는듯 “하하하” 하고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자네 말이 맞네, 맞아. 당조. 거 당조 3대시인이 바로 리백, 두보, 백거이가 아니던가. 근데 두분 다 금방 읊은 시의 제목은 알고들 있나?”


료운주주임과 박만복의 흥미 짙은 눈길이 동시에 장부성장의 너부죽한 얼굴을 직시했다. 그러자 장부성장이 술병을 들어 둘의 빈 잔에 다시 술을 부으며 침묵을 깼다.

“백거이가 열여섯살 때 지은 시라고 하는데 제목은 ‘들풀’이래. 불에 타도 이듬해면 파랗게 살아나는 들풀의 강한 생명력을 노래한 시인데…”


장부성장은 잠간 말을 끊더니 박만복의 앞에 물고기 한점을 집어놓으며 의미심장한 눈길로 이윽토록 응시했다.


“자,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만하겠지? 가슴에 불을 지펴도 타버리지 않는 사나이야말로 진정 들풀인줄을. 그 점에서 우린 들풀을 본받아야 한다구. 한번의 실패에 영영 타버리지 않고 이듬해면 더욱더 파랗게, 더 왕성하게 자라나는 들풀처럼 이제 우리 길림성대도…”

“들풀!”

박만복은 가슴이 울컥했다.


그렇다. 내 이제 들풀처럼 살리라. 가슴에 불을 지펴도 타버리지 않는 들풀 같은 사나이가 되리라. 어디 한번 이 가슴에 불을 지펴보자! 용암같이 뜨거운 불을 지펴 그 불의 기운을 안고 룡트림하며 이 신주의 드넓은 땅을 질주해보리라, 흔들어보리라! 밟혀도밟혀도 쓰러지지 않는 들풀! 태워도태워도 또 파랗게 살아나는 들풀!

이 진리의 그늘밑에 내 이제 투혼의 행장을 풀고 마음껏 기지개를 켜볼테니 오너라 만난이여, 승리의 동반자여…



“3종1대”


“뿡-”

암야의 정적을 깨뜨리는 렬차의 기적소리가 박만복의 귀전을 긁어왔다. 그의 눈길은 언제부터인가 차창옆 탁상에 놓여있는 자그마한 꾸레미에 박혀있었다. 가담가담 차창으로 흘러드는 불빛에 눈동자가 번쩍였다. 지금 그는 한점의 미동도 없이 그 꾸레미를 지그시 응시하고있는중이였다.


안해의 정성이 깃들어있는 고추장꾸레미, 타향의 느글느글한 음식에 입맛이 갈 때면 꼭 잊지 말고 맛 보라며 넣어주던 안해의 근심어린 얼굴이 금방 돌이 지난 아들애의 귀여운 모습과 엇바뀌며 박만복의 뇌리로 스쳐가고있었다. 박만복은 “벙어리 랭가슴 앓듯한다”는 속담을 엉뚱하게 떠올렸다.


벌써 두해째 외로운 직녀로 그리움을 달래고있는 안해마저 자신이 지휘봉을 잡은 길림성축구팀의 강등때문에 음으로, 양으로 뒤욕을 들어야만 했던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밤, “와지끈!” 하고 창문을 부수며 들어온 돌멩이때문에 안해는 장밤 놀란 가슴을 안고 한밤을 지새웠다.


실패의 멍에란 이토록 버겁고도 짐스러운것이였다. 일조에 타매, 규탄, 원망, 증오 등 발설의 과녁이 되여가지고도 변명 한마디 못하고 온갖 심신의 상처를 속으로 감내해야만 하는 이 괴로운 처지! 그 상처를 치유할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면 오로지 재기하여도로 영광을 찾아오는 길, 그 하나뿐이였다!


박만복과 안해 김숙자.


박만복의 안해 김숙자는 초급중학교시절에 만복이의 한학급 동창으로서 나이는 그보다 한살 아래였다. 공부도 뛰여나게 잘했고 교내 공연대 무용배우에 배구대 선수로까지 활약하는 등 다방면의 재질을 갖춘 활달한 녀성이였다. 무용을 하다보니 체격은 말할나위 없고 얼굴 또한 복사꽃같이 어여뻤다. 그들의 사랑은 왕청현 흥당련합중학교를 졸업하던 날에 움트기 시작했다. 1952년, 자치주 창립을 경축하여 펼쳐진 연변 제5차 체육운동대회에서 박만복은 연변고중축구팀 대표선수로, 김숙자는 연변사범학교 학생으로 극적인 상봉을 하게 되였다. 그뒤 6년이라는 긴 마라손련애끝에 1958년 12월 18일에 끝내 결혼에 골인하게 되였다.


박만복에게 있어서 안해 김숙자는 마음의 안식처였고 려로에 지친 나그네의 따뜻한 보금자리였다. 북경팀에서 뛰던 선수시절,국내 갑급팀련맹경기에서 다리에 상처를 입고 병원에서 신음하고 있는 그를 위해 골무떡과 배추김치를 한 보따리 해가지고 허위허위 북경에까지 찾아왔던 안해한테 그는 더없이 미안했다.


더구나 이번 실패로 하여 안해에게 준 상처는 박만복의 가슴을 무겁게 지지누르고있었다. 우선 그 실패의 원인부터 밝혀야 했다. 하다면 무엇이 빌미였을가? 모두들 내가 재래로 고수해온 조선족축구팀의 전통을 잊고 기술만 추구했다고 하는데 그럼 그 전통이란?


“길림성축구팀은 자고로 용맹하고 완강했단 말이요.”

원로축구인 박로석의 웅글진 목소리가 방불히 귀전에 들려오는것만 같았다. 그렇다면 그 용맹하고 완강한 풍격은 어디에서 오는거지?

“빠른 속도와 건장한 체질.”

치렬하게 벌어지는 90분간의 경기에서 매 선수들마다 공을 차지하고있는 시간은 고작해야 3분 가량에 지나지 않는다. 그외의 대부분 시간은 공을 직접 다루지 못하고 자신의 신체조절과 팀의 전술, 전형에 좇아 활동하는 시간이다.

(옳거니, 그러니까 훈련에서 사달이 생긴게로구나!)

부동한 환경, 부동한 기후조건에서 몸체가 육중하고 신장이 큰 팀과 맞다들게 된다면 건장한 체력과 빠른 속도가 없이는 근본 초수준급의 개인기를 발휘할수가 없다. 나아가 팀 전체의 전술구사에도 영향을 받게 된다. 그것을 고려하지 않고 무모하게 접전했다가는 오히려 맥만 빼게 되며 선수들이 부상을 당하고 상처를 입는 역효과를 가져올것이 뻔하다.


문득 박만복의 뇌리에 1953년, 상해에서 진행되였던 전국 11개 도시 청년축구경기에서 연변청년축구팀 대 상해청년팀과의 시합장면이 떠올랐다. 그번 경기에서 연변청년팀은 아쉽게도 준우승을 따냈었다. 우승팀인 상해청년축구팀에 비해보면 기술과 전술면에서 조금 뒤졌을뿐 속도, 힘, 인내력과 활동능력, 실용적인 기술은 절대 뒤지지 않았었다. 특히 견인불발하고 용맹완강하게 싸우는 의지와 작풍은 그 어느 팀도 비길수가 없을만큼 우월했다. 우뢰같이 쏟아지던 관중들의 뜨거운 갈채와 찬양이 그것을 증명했다.



(축구시합에선 체력이야말로 승리의 기초요, 담보라고 할수 있다. 그렇다면 기술과 전술은 승리의 핵심이라고 봐야 한다. 하다면 속도는?… 그렇다, 관건이다!)


박만복의 머리속에 새로운 훈련체계가 바야흐로 무르익어가기 시작했다. 지금 그가 만지작거리고있는 카드는 중국체육계에 불고있는 “3종1대(三从一大)”훈련원칙이였다. 1950년대말, 중국인민해방군 남경군구 제12군 제34사 제100퇀 제2련의 곽흥복(郭兴福, 1930—1985년)련대장이 전사들에게 실시했던 훈련원칙이 이른바 “3종1대”였다. “간고하고 엄격하며 실전적인데로부터 출발하여 대운동량훈련을 진행(从严、从难、从实战出发、大运动量训练)”하는 이 훈련원칙은 대강도, 대밀도, 초경기량 훈련을 견지하는것에 그 기반을 두고있었다.



산동성 추평현 연안촌(山东省邹平县延安村)이 고향인 곽흥복은 14세 나던 해에 참군하여 선후로 국민당 산동성 보안 제3퇀, 제4퇀에서 근무병, 통신병으로 있었다. 1948년 9월, 제남전역에서중국인민해방군에 귀순한 그는 그후 화동야전군 제13종대에 입대했다. 회해전역(淮海战役), 도강전역(渡江战役), 송호전역(淞沪战役), 장하전역(漳厦战役) 등에서 무비의 용감성과 뛰여난 기지를 발휘해 수차 공을 세웠던 곽흥복은 1949년 6월, 중국공산당에 입당한 뒤를 이어 1951년에는 제74사 보병학교와 제4보병학교에 들어갔는데 졸업 당시 18개 과목중 13개 과목은 우수를, 5개 과목은 량호를 받으면서 학교지도부로부터 “상등졸업생”으로 주목받았다. 졸업후 남경군구 제12군 제34사 교도영 패장으로 배치받은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제100퇀 제2련 련대장으로 승진되였다.


전국 11개 도시 청년축구운동대회에서 려대팀과의 시합에서 공을 몰고 돌파하고있는 연변청년팀 선수리학산.


“3종1대”는 바로 이때 그가 고안해낸것이였다. 전사들의 수준제고를 위해 평소 훈련에서부터 모든 과정을 실전에 두고 대운동량훈련을 지속해야 한다는 이 훈련방법은 “실사구시하며 실제로부터 출발하고 리론과 실제를 결부”시키는 모택동의 군사사상과도 일맥상통했다. 따라서 총참모부와 군위 지도자들의 깊은 중시를 불러일으켰고 곽흥복 또한 그 빼여난 성과로 특별표창까지 받았다.


하지만 예측할수 없는것이 하늘의 풍운조화였다.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자 그의 인생에는 사나운 눈보라가 몰아쳤다. 남경군구 고급보병학교에서 촉망받는 후계자로, 중화인민공화국 군사교육계의 총아로 주목받던 곽흥복은 라서경 1) 이 “반혁명”으로 몰리자 그의 “충실한 졸개”였다는 죄명으로 반란파들에 의해 조리돌림을 당했다. 그것은 한마디로 육체적, 정신적으로 도저히 받아당할수 없는 모욕이자 타격이였다. 자료에 따르면 남경시내의 반란파들은 늘 섭씨 40도가 넘는 여름철 고온날씨에 그를 거리로 끌고 나가 입에 짚오래기를 물린채 포장도로에서 포복행진을 하도록 강요했는데 한번 기고는 바닥에다 “쾅!” 머리를 박고 “나 죄가 있는 사람이요!” 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게 했다고 한다.


1) 라서경(罗瑞卿, 1906—1978년), 중화인민공화국 초대 공안부 부장, 국무원 부총리 겸 총참모장. 1955년, 대장군사직함 수여받음.


그런 역경에서도 라서경을 절대 “적발”하지 않는 등 군인으로서의 절개와 우정을 지켰던 곽흥복은 나중에 안해와 상의하고 무언의 항거로 일가족집단자결을 결행했다. 우선 3명의 자녀를 차례로 목 졸라 죽였다. 그 참변을 더는 지켜볼수 없었던 안해가 층집에서 뛰여내리자 곽흥복은 감전사를 시도했다. 그런데 때마침 그의 집을 찾아온 이웃에게 발견되여 자살이 실패하자 곧 주방에 달려들어가 식칼로 온몸을 마구 찍으며 재차 자결을 시도했다. 하지만 결국 목숨을 끊는데는 실패했다. 집에서 뛰여내린 안해도 주위사람들에게 발견되여 생명을 부지하였다. 하지만 곽흥복은 자식들을 살해했다는 죄명으로 사형에 언도되였다.


전사들과 함께 있는 곽흥복(좌 1)련대장.


그때 공화국 건국시 고급장령이였던 리덕생 1) 과 허세우 2) 가이 소문을 듣고 구명운동을 벌인 끝에 그들 부부는 20년 징역을 받고 수감되였지만 전기선을 입에 넣고 감전사를 시도했던 곽흥복은 심한 언어장애로 고생했다. 드디여 “문화대혁명”이 결속되자 리덕생 등 장령들의 노력으로 그는 군구 고급보병학교 전술교연실 부주임으로 복귀했지만 1985년 8월, 지형고찰도중에 차사고로 55세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감했다. 후문에 의하면 사망 당시 그의 몸에서 비닐씌우개를 씌워 간직한 라서경의 사진 한장이 발견되였다고 하는데 현장에서 발견된 유품으로는 그것이 유일했다고 한다.


1) 리덕생(李德生, 1916—2011년), 중국인민해방군 고급장령. 1955년에 소장군사직함,1988년에 상장군사직함 수여받음. “곽흥복교수법”을 총화해냄.


2) 허세우(许世友, 1905—1985년), 중국인민해방군 고급장령. 1955년에 상장군사직함 수여받음.


(계속)


[신철국 장편스포츠실화] 챔피언 1965


차례(지난 기사는 클릭해 볼수 있습니다)

제1장 시련의 계단

봉변/기회의 신(神)결심출국 류학스승의 마음 문제는 어디에?축구의 고향 잊은것과 잃은것/ 어려운 세월에 제로의 답안 /맨발의 선수 첫발자국 /희망을 향하여 


제2장 재기의 언덕

“백전로장” 원수(元帅)가 준 별호 /최초의 전설들(1) 최초의 전설들(2) /

새로운 출발 “3종1대”개천의 룡들(1) 개천의 룡들(2) 이사도(二沙岛) 

희로애락 “몰인정”했던 리유 뒤로 밀린 리발 신입대원 정동권 

제3장 승자는 말한다

원자탄 불청객 분노의 벽 빅장대결 귀로의 기쁨 영광의 서장(1) 영광의 서장(2) 불멸의 승부(1) 불멸의 승부(2)




신철국

작가


연길명동문화예술원

부원장

【신철국 작가 프로필】

1971년 왕청현 하마탕향 전하촌(汪清县蛤蚂塘乡前河村)출생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학부 졸업


연변민족문학원(제1기/1994년), 로신문학원(제30기중청년고급연구토론반·아동문학/2016년) 수료.


‹중국조선족백년실록›집필위원회 위원(스포츠) 력임.


연변텔레비죤방송국 청소년부, '흑룡강신문','길림신문'에서 다편간 편집, 기자로 활약. 연변작가협회 회원.


1986년 아동소설 '신방주인'으로 등단.


'화신문학상','압록강문학상','흑토문학상','연변라지오문학상','상익컵 실화문학상' 등 수상경력 다수. 


단행본 장편스포츠실화 ‹챔피언 1965› 출간.


공저로 ‹60주년에 만난 60인›, ‹중국조선족백년실록›, ‹연변축구의 발자취를 찾아서› 등이 있음.


현재 명동문화예술원 부원장 겸 글짓기지도로 근무.


 안내 : "문학작품"은 sinbalam과 위챗친구하여 보내주시면 등재해드립니다.-신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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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작가
칼럼||김혁채영춘리성일우상렬허명철박광성강효삼리성일장동일박광해최학송박승권김혁현춘산채영춘주소란|박광성|예동근|김범송김경애김문일김광림리동렬김정룡문학궁금이김창영허강일궁금이회령김정권최상운김훈지향옥림운호김병민손룡호궁금이렴광호리해란서가인신철국최화길손룡호허강일이문혁김학철김혁림원춘허미란박장길렴광호김재현김수영김두필김일량남영전현춘산서가인리문호리광인김혁한석윤|허미란김학송김호웅남룡해김정권김영분림운호장학규리련화한영철김경진김영택김병민김복순최상운회령채영춘김명숙류영자김춘실류재순려순희김홍남윤청남리동춘심명주최화김명순[허강일 추리소설] 도시는 알고있다18[허강일 추리소설] 흉수는 바로 그놈이였다력사[구술] 김학철(7)[珍藏版]리광인 '70년대 사람들'|[구술] 남영전(1) (2) (3) (4) (5) (6) 양림(구술)채영춘(10) 리광인 실화문학《아,나의 중학시절이여》(구술)림원춘(7) |특집[珍藏版] 우리말 어원 산책(렴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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