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닷컴] (수필) 엄마 (김홍남)
조글로
(수필)
엄마
김홍남(필명 설원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철이 들어서인지 요즘은 엄마 생각이 자꾸 난다.
우리 엄마는 할머니 에게서 4자매중 맞이로 태여 났다. 다들 도시에서 살고 있었는데 유독 엄마만 농촌에 시집갔다. 아버지와 결혼 할 때 사진을 본 적이 있는데 그땐 엄청 이쁘셨다.
어렸을 때 엄마 따라 목단강 외 할어니네 집에 자주 갔었는데 갈 때마다 도시에서 사는 이모들과 농촌에서 사는 엄마의 비교되는 모습이 너무 초라해 보였다. 울 엄마는 군일 있을 적마다 부뚜막은 전용자리셨는데 림원춘의 소설 '몽당치마'가 련상되는 장면들이였다.
울 엄마는 현처량모 였다. 아버지가 가목사 화남현 어느농촌에서 촌지서로 활약 했었는데 엄마는 딸애를 낳다가 상처한 아빠의 후처로 들어가서 처음에 낳은 두딸(3살 5살)은 죽고 내리 또 딸만 4명이나 낳았 (셋째위로 또 하나를 잃었음)단다. 아들 아들 하다가 60년대 해림현 해남조선족향 홍성촌으로 이사온 후에야 내리 아들 둘을 낳게 되였단다.
내가 알기론 50년대 아버지가 마을 촌지서로 공작하실 때 지적이고 똑똑하고 잘생기고 언변이 좋고 인기가 많다보니 잠간 눈이 팔렸었는지 자식 셋이나 낳은 엄마와 리혼하고 다른 녀자와 살림을 차렸다가 새 엄마가 애들을 너무 때리는 바람에 다시 재결합을 하셨다고 했다. 엄마가 아버지와 헤여진후 목단강 시내에 계시는 할머니네 집에 돌아 왔었는데 그때 원래는 목단강 시내에서 살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새 엄마가 애들을 너무 때리고 또 출가 외인이니 새끼를 봐서라도 돌아가라는 외할아버지의 충고와 새끼들도 보고 싶은 마음에 도시인이 되는 기회를 놓치고 다시 농촌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만약 그때 또 리혼 했더라면 그후 나와 형님은 물론 이 세상에 태여나지도 못했을 것이였다.
아들 아들 하다가 형님은 시내에 계시는 외할머니집에서 엄마가 얻어온 우유를 먹어가며 잘 자랐었고 아들 하나면 됐으니 또 딸이면 어쩌나하고 나는 목단강 병원까지 류산하러 갔다가 너무 늦었다 해서 할 수 없이 낳았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누나들이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 길래 그땐 정말인줄로 알았었다. 그래서 엄마에 대한 집착이 더 강해졌는지 아님 막내로 자라서인지 소학교 다니면서까지 엄마 곁에서 자고 젖을 빨았다고 한다.
울 엄마는 전형적인 현처량모였다. 울 아버지는 우리 자식들에게는 아주 무서운 존재였다. 술도 고작 한잔 정도 마신다. 한번도 취사를 부리거나 욕하거나 때린 적이 없는데도 말이다. 엄마도 싸우거나 대꾸 하는것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 화가 나면 그냥 헛간에가서 울고 나온다. 그러면 우리 형제들도 쪼르르 엄마곁을 지키고 떨어지지 않는다. 아버지만 혼자 덩거러니 밥상에 남겨놓고.
아들 아들 하며 낳은 자식들은 효도는 커녕 엄마에게 상처를 준 날들이 더 많았다.에너지가 넘쳐나 혈기왕성하던 철모르던 시절 싸움도 하고 다닐 때도 엄마는 자신의 잘못인양 한숨 쉬며 속으로 혼자서 울기도 많이 울으셨다.
5살에 교통사고로 친 손자가 숨졌을 때 엄마는 누구보다도 더 구슬프게 우셨다.
울 엄마는 누구하고도 다투거나 싸운 적이 없었다. 며느리가 둘이나 있었지만 한번도 얼굴 붉힌 적이 없다. 두 며느리 모두 착하기도 했지만 엄마는 일체간섭을 안했다. 묵묵히 아침 일찍 일어나서도 불을 지피고 밥을 지으셨다. 온갖 집안일도 예나지금이나 똑같이 하셨다,.그래서 인지 안해는 지금도 우리 집안에서 당신 엄마 많은 좋았다고 외운다.
한번은 북한에서 나에게는 이복누이가 되는, 난산으로사망했다는 아버지의 전처가 낳은 자식이 우리집에 왔었는데 엄마는 없는 살림에도 잘 대접시키고 한보따리 짐도 챙겨서 줘 보냈었다.
내리 자식 사랑만 있고 올리 부모 사랑은 없다고 한다. 그만큼 가정을 이룬후 자식 키우기에 딸애만 신경썼지 엄마에게 맛있는 음식한끼 옷한벌 사준 같지도 않다. 고작 한국 오기전 엄마가 고향친구네 집 이사를 도운다고 나갔다가 새벽바람에 풍을 맞고 누워 계셨을 적에 몄달인가 호리한 것이 전부다. 한국에 와서도 돈만 부쳐주면 되겠지 하고 전화 한통 한 적이 없다. 물론 풍 맞은 엄마라 대화는 불가능 하셨겠지만 아들의 목소리라도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을가?!... 못난 아들이였지만 언제 또 돌아올가고!...
한국에 데려간 하나 밖에 없는 귀여운 친 손녀는 또 얼마나 보고 싶었을가?!...
어머니가 돌아 가신지도 15년쯤 되가고 있다. 내가 한국에 떠나기전 풍을 맞았고 2년도 안돼서 전화 한통 얼굴 한번 못 보고 세상을 떠나셨다. 바쁘다는 핑계로 마지막 가시는 길도 지켜주지 못했다. 한국에서 제사상도 차려본 것 같지 않다. 3년 제사때에야 한번 중국으로 가서 통곡하며 울어본게 지금도 죄책감으로 가슴이 아파난다. 50살이 넘어 이제서야 사람이 될라는지 림종도 못지켜 드린게 평생 나의 가슴속에 한으로 남아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있을 때는 잘하지 못하다가 돌아가신 다음에야 후회 한다. 밥맛 없다 투정을 하기도 하고 지겨운 가난이 부모의 잘못 인양 불평도 부리던 반항의 사춘기 시절, 그럴 때면 눈굽을 훔치며 우시던 엄마를 생각하면 지금도 쥐구멍이라도 찾아들어가고 싶은 심정이다. 엄마를 속썩였던 일들을 생각하면 창피해서 이루 다 더 적어 내려갈 수가 없다.
하지만 이제 와서 땅을 치며 통곡 해도 무슨 소용이 있으랴. 정말로 엄마가 다시 1년이라도 이 세상에 돌아 올수 있다면 진심으로 두손 모아 빌고 또 빌며 정성껏 효도하고 싶다.
엄마! 부디 저세상 에서는 아픔없이 즐겁고 행복하고 건강하게 사셔야 해요!
불효자는 오늘도 웁니다!
김홍남
(필명 설원이)
작가
김홍남의 작품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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